광명동굴은 역사적인 산업문화유산이자
새로운 역사 창조의 공간입니다
일제강점기 징용과 수탈의 현장광명동굴은 1903년 5월 2일 시흥군 가학리에 「시흥광산」이 설립되었다는 최초의 기록이 있습니다. 일제강점기에 들어서면서 광업권 침탈 차원에서 당시 조선총독부는 대한제국 고종황제를 압박하며 ‘광상조사기관’을 설치하고 금·은 광산을 발견해서 이를 독점하려고 안간힘을 쏟았습니다. 광명동굴(구 시흥광산) 역시 1912년 고바야시 토우에몬 일본인의 이름으로 다시 광산 설립이 되었고 ‘광상조사기관’을 앞세운 일제의 광업권 침탈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당시 광산에는 대부분 농민 출신으로 징용과 생계를 위해 온 광부들이 많았으며 전성기 때에는 500여 명의 광부가 근무하였다고 합니다. 일제강점기부터 채굴된 광물들은 일본으로 보내져 태평양 전쟁의 무기가 됐고 해방 전까지 엄청난 양의 광물이 수탈되었습니다. 100년이 지난 현재 광명동굴은 자료 소실로 인해 몇 점 안되는 잔존 유물과 생존광부의 증언에 의해 광산 역사를 짐작할 뿐입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의 뼈아픈 과거 역시 광명동굴의 역사적 흔적이며, 해방 후 산업경제발전에도 기여한 광산 산업 유산으로서의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1912~일제강점기
광산설립 및 채굴시작
1950~1952
한국전쟁 기간 중 주민들의 피난처
1961~1962
광명 지역 최초의 노동 운동 발생지
1961년과 1962년 사이 시흥광산(광명동굴의 옛 이름)에서 벌어진 노동운동은 광명지역 최초의 노동운동이었으며, 1961년 5월 16일 이후 발생한 첫 노동운동이었습니다.


1972
폐광
1972년 8월 대홍수로 광석찌꺼기 등이 휩쓸려 내려가면서 환경오염과 보상문제로 폐광되었습니다.
1978~2010
소래포구 새우젓 저장소로 사용
1978년 최초로 소래포구의 새우젓을 보관하였으며 연간 3,000 여 드럼의 새우젓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이 정도 물량은 서울과 수도권 주민들이 한 두 번쯤은 이곳에서 숙성된 새우젓으로 김장을 담갔을지도 모를 엄청난 양이었습니다
2011년 개방 이후2011년 개방 이후 200만 명 이상 의 관람객 방문
2011
가치의 재발견
광명동굴 토지 매입, 시민에게 개방
2012
시민의 품으로
산업 현장으로서 지난 100년의 역사를 간직했던 광명동굴은 2011년 8월 40년만의 어둠을 걷어내고 시민들에게 개방을 시작해 그 해 10월 최초로 동굴음악회를 열었으며 2012년에는 뽀로로 영화 및 동굴 최초 3D영화를 상영하기도 했습니다.
가치 재발견과 도심 속 복합문화예술공간으로의 변신
가치 재발견과
도심 속 복합문화예술공간으로의 변신
2013
세계 최초 동굴예술의전당 개관
복합문화예술공간으로서 광명동굴이 큰 주목을 받게 된 것은 2013년 6월 350석 규모의 동굴예술의전당을 개관하면서부터였습니다. 오페라뮤지컬, 패션쇼 등 다양한 문화예술 행사를 본격적으로 시작했고 동굴문명특별전 등 의미 있는 전시공간으로서도 자리매김 하였습니다.
2014
문화예술창조공간으로 우뚝
2015
2016 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