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명동굴 GWANGMYEONG CA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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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의 이야기, 그리고 새로운 100년의 시작. 바로 광명동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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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최고의 동굴테마파크 광명동굴」 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광명동굴은

폐광의 기적을 만들다
창조의 메카, 광명동굴

 

1912년 일제가 자원수탈을 목적으로 개발을 시작한 광명동굴(구.시흥광산)은 일제강점기 징용과 수탈의 현장이자 해방 후 근대화ㆍ산업화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산업유산이다. 1972년 폐광된 후 40여 년간 새우젓 창고로 쓰이며 잠들어 있던 광명동굴을 2011년 광명시가 매입하여 역사ㆍ문화 관광명소로 탈바꿈시켰다. 광명동굴은 산업유산으로서의 가치와 문화적 가치가 결합된 대한민국 최고의 동굴테마파크라는 평가를 받고 있으며 연간 100만 명 이상의 관광객이 찾는 세계가 놀란 폐광의 기적을 이루었다.

광산 시작년도 : 1912년
광산 폐광년도 : 1972년
채광물질 : 금, 은, 동, 아연 등
갱도길이 : 7.8km(개방 2km)
갱도층수 : 0레벨 ~ 지하7레벨(총8레벨)
총 깊 이 : 275m
세계가 주목하는 문화 창조공간

동굴이라는 공간적 차별성과 희귀성은 문화예술 콘텐츠와 결합되어 새로운 창조문화를 만들어가고 있다. 동굴 예술의전당을 시작으로 동굴 곳곳은 수많은 예술가와의 협업을 통한 작품을 관람할 수 있으며 어둠을 배경으로 한 빛과 뉴미디어는 상상이상의 감동을 이끌어내고 있다. 또한 산업현장으로만 여겨지던 갱도는 와인동굴로 변신해 소통의 공간으로 이용되고 있어 새로운 컬쳐 라이프 스타일을 제시하고 있다. 폐광을 복합문화예술공간으로 재생시킴으로써 국내를 넘어 세계가 주목하는 문화 창조공간으로 주목받고 있다.

  • 광명동굴 전경1
  • 광명동굴 전경2
  • 광명동굴 전경3
  • 광명동굴 전경4
황금동굴 전경
황금광산, 황금동굴 황금광산으로 개발되었던 광명동굴은 1950년을 기준으로 동굴 내 광물의 총 매장량은 1만9천톤으로 추정되며 당시 석탄 공사 자료에 따르면 1955년부터 폐광된 1972년까지 52kg의 황금을 캤으며, 광산채광을 시작한 1912년부터 1954년까지는 수백kg 이상의 황금이 채굴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1972년 폐광된 것은 홍수에 의해 환경오염과 보상문제 때문이었으며, 그래서 지금도 동굴에는 많은 양의 황금이 묻혀있다는 게 전문가의 분석입니다.
황금의 땅, 광명동굴 동굴에는 아직 많은 양의 황금이 남아 있어 엘도라도(황금을 찾아서)의 꿈을 꾸는 사람이 있습니다. 부귀영화의 상징이자 시대를 넘어 변하지 않는 가치를 지닌 황금의 다양한 진면목을 이제 광명동굴에서 체험할 수 있습니다.

글로벌 관광명소
광명동굴의 기적은 계속된다!

 

연간 200만 관광객, 글로벌 관광시대를 열다! 광명시가 2018년 200만 글로벌 관광시대를 여는데 광명동굴은 그 중심에 서있다. 광명동굴은 2019년 한해 미디어파사드쇼와 첨단 미디어를 접목한 VR체험(가상현실), 공포체험관, 타임캡슐, 공룡체험전, 인터렉티브 체험전 등 새롭고 다양한 콘텐츠를 개발해서 유료관광객 120만명을 목표로 하고 있다.
글로벌 관광시대
세계가 주목하는 광명동굴 광명시 대표단은 2016년 5월 말 프랑스 의회와 도르도뉴주의회 초청으로 파리를 방문해 '광명동굴 성공사례 및 라스코 동굴벽화 광명동굴전의 의미' 등을 발표해 프랑스 정치인들과 시장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다. 광명시는 라오스 정부에도 동굴개발 성공사례를 전수해 주고 있으며 광명동굴에는 벤치마킹을 위해 방문하는 전 세계 공무원들의 발길이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황금동굴 전경
국내 최대의 용 '동굴의 제왕' 반지의 제왕, 호빗 등의 판타지 영화를 제작한 세계적인 영상기업 뉴질랜드 '웨타워크숍'이 제작한 실물크기의 골룸과 간달프 지팡이, 국내 최대의 용(길이 41m, 무게 800kg)인 '동굴의 제왕'이 함께 전시되어 있다.

일제강점기
징용과 수탈의 현장

 

"폐광 후 40여 년의 시간만큼 먼지 쌓인 광부들의 낙서는
역사적, 산업적 가치를 고스란이 간직하고 있다."
광명동굴의 최초의 기록은 1903년 5월 2일 가학리에 「시흥광산」이 설립되었다는 기록이었다. 일제강점기에 들어서면서 광업권침탈차원에서 당시 조선총독부는 대한제국 고종황제를 압박하며 '광상조사기관'을 설치하고 금ㆍ은광산을 발견해서 이를 독점하려고 안간힘을 쏟았다. 광명동굴 역시 1912년 고바야시 토우에몬 일본인의 이름으로 광산 설립이 되었고 '광상조사기관'을 앞세운 일제의 광업권 침탈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당시 광산에는 대부분 농민 출신으로 징용과 생계를 위해 온 광부들이 많았으며 전성기 때에는 500여 명의 광부가 근무하였다고 한다. 일제강점기부터 채굴된 광물들은 일본으로 보내져 태평양 전쟁의 무기가 되었고 해방 전까지 엄청난 양의 광물이 수탈되었다.
일제강점기, 징용과 수탈의 현장

 

세계문화 유산의 가치
근대산업유산으로서의 보전과 활용
광명동굴은 108년의 시간이 지난 지금도 광산역사와 함께 상부레벨로부터 지하7레벨까지 7.8km의 갱도와 외부에 광석을 선별하던 선광장터가 현재까지 그대로 남겨져 있다. 선광장은 한 덩이 한 덩이를 쌓아 올린 석조 플랜트와 숨 가쁘게 움직였을 기계를 받쳐주던 콘크리트 기초들이 남겨져 있어 당시 산업건축양식을 분석할 수 있는 시설일 뿐만 아니라 산업시설로서의 용도를 파악할 수 있는 학술자료의 주요한 시설이다
또한, 선광장 터와 더불어 광명동굴 내 지하갱도는 갱도구조를 통해 광산개발의 방식과 통풍, 환기 등 지하갱도에서의 작업환경을 알 수 있는 살아있는 자료이다. 이러한 산업역사현장으로서의 가치와 더불어 폐광 후 40여 년의 시간만큼 먼지 쌓인 광부들의 낙서 이것이야 말로 역사적 가치와 산업적 가치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일제강점기의 수탈의 현장이었던 시간과 함께 근대산업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던 역사의 순간까지 광명동굴은 108년 의 긴 시간 동안 숫한 역사를 써 내려간 유형의 자산과 무형의 자산을 공유하고 있다. 이제 근대산업유산으로서의 보전과 문화예술을 통한 도시재생을 위한 활용을 통해 성공적인 도시재생의 사례로 남고자 한다.
광명동굴 내부안내도
광명동굴 내부안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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